낙서장/신문 기사들

파란만장 심영순씨의 인생

joyhome 2007. 12. 30. 20:01

파란만장 심영순씨의 인생

 

"일본군, 조선의용군, 그리고 북한 탈출, 탈출… 또 탈출
2년 만에 집에 오니 영정이…”

 

이 기사는 weekly chosun 1987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심영순(85·沈榮錞)씨는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60년 전 이야기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1944년 일본군 학병으로 강제징집된 심영순씨는 폭력과 배고픔을 참지 못해 탈영했습니다. 탈영하고 간 곳이 중국군이었고, 이곳에서 중국공산당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으로 인계됐습니다. 다시 조선의용군으로 인계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조선의용군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종로 한일관과 청진동 다방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그를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30분에 한 번씩 쉬는 시간을 갖자면서도 하루 서너 시간씩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가 겪은 일에 대해 토로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심영순씨처럼 일본군과 조선의용군을 거쳐 남한에 정착한 사람은 엄영식(嚴永植), 안국두(安國枓), 신상초(申相楚), 방휘제(方揮濟), 정근석(鄭根碩), 한명삼(韓命三), 최일운(崔逸雲), 이재극(李載克), 안휴민(安烋珉)씨 등 모두 13명.

이들 가운데 현재 심영순·이재극·안국두씨가 살아 계십니다.

 

▲ 심영순씨와 마찬가지로 1944년 일본군에 강제 입대한 어느 조선 청년의 모습. photo 한국사회문화연구원

기차가 만주 벌판으로 접어들었어. 평양을 떠나온 지 반나절은 족히 넘은 것 같았지. 1944년 봄, 스물두 살이었어.


동경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귀국했지. 도착하자마자 학병으로 징집영장이 나왔어. 참담했어. 일제는 배운 놈들을 사회에 그냥 두면 시끄럽다고 대학 졸업한 젊은이들만 골라서 강제로 군복을 입혔어.

종로에서 술을 마시다 순경한테 붙잡혀 광화문 총독부로 끌려갔지. 꼿꼿하게 앉아서 입대 서류에 서명 안 하겠다고 버티고 있었어. 경찰이 난데없이 부모님과 전화 통화를 시켜줬어. 부모님은 그때 고향인 평북 정주에 계셨는데 나 때문에 유치장에서 전화를 받으셨어. 일본 경찰은 내가 입대원서에 사인만 하면 부모님을 풀어주겠다고 했지. 그래서 사인했어.


평양 42부대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았어. 매일 아침 천황에 대한 인사 같은 걸 하는데 속으로 참 웃겼지. 입대하자마자 삭발을 시켰는데 거울을 보니 거짓말 같았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요새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조국이 없다는 건 그런 서러움이오.


만주 전지로 떠나기 전 어머니, 아버지가 훈련소로 면회를 오셨어. 일본 군복 입은 아들을 보시니 기가 막히셨는지 두 분 다 말씀이 없으셨어. 어머니가 싸온 도시락을 먹었지.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이랑 기념사진을 남기겠다고 부대 근처에서 장사하는 사진사를 부르기도 했는데, 나는 사진으로 그런 모습을 남기고 싶지 않았어. 일본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행여 다른 이가 볼까 두려웠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죽지 마라”고 하시던 게 지금도 생생해. 내 나이 올해 여든다섯, 어머니 말씀처럼 나는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어.


평양에서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신의주까지 올라갔어. 기차 안에서 먹은 일본식 주먹밥이 정말 맛있었지. 열차 칸마다 일본 헌병이 두 명씩 지키고 있었어. 허리에 칼도 차고 총도 차고 있었지. 우리는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몰랐어.


그러다 기차가 산해관에서 잠시 멈췄어. 중국과 만주국의 경계 지역이지. 기차에 기름도 넣고 물도 싣고 있는데 나는 이때 탈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창 밖을 보니 총을 멘 일본군이 너무 많았어. 목숨 걸고 탈출해볼까 했는데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나 때문에 괴롭힘 당할까 그게 두려웠어. 주먹만 꼭 쥐고 말았어. 기차가 다시 떠나고 한참을 가고 다시 섰는데 서주였어.


나는 일본군 북지파견군 75사단 보병부대에 배치됐어. 이등병이지. 중대원은 150명인데 조선 학병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었어. 말단 이등병에다 조선 사람이라고 아주 심하게 괴롭혔어.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지. 나는 일본군 고참들이 괴롭히는 것보다 배가 고픈 게 더 괴로웠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황국신민선서를 하고 나면 밥을 먹는데 풀기 없는 밥이랑 단무지가 다였지. 그래도 맛있게 먹었어. 신기하게 항상 배가 고팠지.


점심을 먹으면 오수 시간인데 1시부터 3시까지 두 시간 낮잠 자는 게 정말 행복했어. 나는 그때 투쟁이니 독립이니 그런 생각이 안 들었어. 하루하루 매 안 맞고 배 안 고프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지.


저녁에 내무실에 있으면 일본군 고참들이 조선 학병을 괴롭히면서 웃지. 개처럼 엎드려서 군화를 입에 물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고참들 발 밑에서 재롱을 피웠지. 그러면 발로 차고, 넘어지면 또 다른 고참한테 기어갔어. 그럼 또 발로 차지. 제일 잔인한 건 ‘다이코빈타’라고 조선 사람끼리 마주보고 때리게 하는 것이었어.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끌려온 김인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육상 선수 출신이라 힘도 좋고 몸도 좋았어. 나는 항상 김인규랑 한 짝으로 ‘다이코빈타’를 했지. 약하게 때리면 일본군 고참이 더 세게 몽둥이로 두들겨 패니까 있는 힘껏 때려야 하는데 그때 이가 다 부러졌어.


내가 종종 반항해서 탈출할까 두려웠는지 밤에 잘 때마다 일본군 상병과 내 발목에 수갑을 채워 묶었어. 가끔 새벽에 잠을 자다가 깨기도 하지. 주번사령이 총기를 검열하러 돌아다녔는데 나는 매번 걸려서 총기를 혀로 핥았지. 그리고 또 매를 맞아요. 매 맞아 죽을 것 같아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일병이 됐을 때 환갑을 넘은 일본군 이등병이 들어왔어. 일본은 그때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남자면 전부 전쟁터로 보냈지. ‘바바’라는 아저씨였는데 그래도 내가 고참이라고 내 내복을 종종 빨아줬지. 나 보고 중국 사람이냐고 물어서 조선 사람이라고 했더니 빨리 도망가라고 했어. 참 좋은 사람이었지. 그 아저씨한테 유곽 이야기도 들었어. 유곽에 가면 전라남도 순천에서 온 아가씨가 있는데 너무 말라서 불쌍하다는 말도 했지. 나는 조선의 여동생들이 하루에 10명씩 일본군과 성관계를 갖는다는 얘기를 듣고 세수하다가도 밥 먹다가도 눈물이 났어.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방법이 보이질 않았어. 일본군을 탈영한 조선 사람은 그때까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일단 밤에는 발에 수갑을 채우니 탈영이 불가능하고, 오후엔 너무 밝아서 총에 맞을 확률이 높아. 오수 시간을 노리기로 했지. 일본군은 항상 부대 주위에 호수를 파놓고 울타리를 대신했어. 호수는 중국 사람들을 동원해 파는데 깊이가 5m가 넘지. 오수 시간엔 길게 앉아 빨래를 하라고 그 호수에 다리를 놓았어. 그때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때를 노렸지.

 

▲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비문 앞에 선 심영순씨.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하루는 빨래하러 가는 척 내복만 입고 빨래터로 가는데 그날따라 다리에 아무도 없었어. 그 끝 부대 입구 초소에서 경비병도 졸고 있었지. 부대를 나가면 뭐가 있는지 그게 불안했지만 나는 일단 뛰기로 했어. 심장이 쾅쾅 뛰었지. 부대를 나가니 보리밭이었어. 내 키보다 더 높은 장대 보리들이 빼곡했지. 그 안으로 들어가 쉬지 않고 뒤도 안 돌아보고 계속 뛰었지. 뛰다 보니 새벽이었어. 12시간 넘게 잠도 안 자고 뛰었거든. 강가에 앉아 물을 마시려는데 땀을 많이 흘렸는지 내복이 축축했어. 그런데 그게 땀이 아니라 전부 피였지. 보리밭에서 긁힌 상처들 때문에.


강가를 따라 한참을 걸으니 멀리 강 건너편에 사람 사는 동네가 나왔어. 그런데 자세히 보니 사람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어. 일본 군대에서 항상 들은 얘기가 “신사군은 일본군을 잡으면 사람 껍질을 벗겨서 삶는다”였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착각한 거였어. 세뇌라는 게 환영까지 만들어낸다는 걸처음 알았지. 중국 신사군에 일본군이라고 투항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만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지.


강에 들어서니 물이 허리까지 찼어. 아침 6시쯤, 강을 건너 둑을 넘고 부락에 들어서니 갑자기 총 든 사람 여섯 명이 뛰어오더니 나를 둘러싸고 “부여뚱! 부여뚱!”이라고 소리쳤어. ‘부요동(不要動)’, 움직이지 말라는 말이었지. 내가 조선 사람이라고 어설픈 중국말로 설명하니 한 사람이 종이랑 연필을 갖고 왔어. 한자는 알고 있으니까 필답을 했지.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고 강제로 징집된 학병인데 어렵게 일본 군영을 탈출했다. 내 말을 듣더니 그들은 총을 거뒀어. 그리고 삶은 돼지고기 한 사발을 갖다 줬지. 아, 정말 맛있었어. 그 많은 걸 한 점도 안 남기고 다 먹었지. 덕분에 다음 날 설사를 했지만.


중국도 반일운동이 한창일 때라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 사람이라고 나는 영웅 대접을 받았어. 부락에서 한번은 인민대회 같은 걸 하는데 나 보고 나가서 연설을 하라고 했어. 단상에 올라서니 사람이 정말 많았어. 1만명도 넘는 것 같았어. 확성기에 대고 내가 조선말로 연설하면 옆에 있던 조선족이 중국말로 통역했지. 박수, 함성 소리가 요란했어. 중국 사람들은 나보고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살아돌아온 귀신이라고 했소. 거리에서 만난 중국 사람들이 나를 꼬집어 보고 때려 보고 만져 보고 난리도 아니었지. 몸에 피멍이 들 정도였으니까. 일본군이 얼마나 악랄했으면 군대에서 살아돌아왔다고 그렇게 신기해 할까.


새 이름을 받았어. 최진호. 일본군이 추적해 암살할 수도 있으니 원래 이름을 버리라고 했어. 최진호라는 이름으로 당나귀를 타고 주야행군을 시작했지. 중국군은 주야로 걸어서 300리를 갈 만큼 기동성이 높은 군이었어. 당나귀를 타서 다리는 괜찮았는데 엉덩이는 다 까졌지.


20일 넘게 당나귀를 타고 도착한 곳이 중국공산당 산하의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이었어. ‘동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무척 어색했어. 아지트라고 가르쳐줬는데 맨땅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맨땅에서 12명이 올라왔어. 작은 토굴을 파둔 것이지. 그 작은 굴 속에 어떻게 12명이 들어갔는지 신기했어. 나는 곧바로 공작업무를 맡게 됐지. 일본 군대에 있는 조선 학병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게 임무였어. 내가 쓴 삐라가 24시간 안에 일본군에 있는 조선 학병 머리맡에 놓인다고 했소. 탈출 방법, 시간, 경로를 자세히 그려 넣었지. 그때 일본군은 이미 허점투성이였던 거지. 이미 망한 것이지.


내가 쓴 삐라 수백 장이 일본 군대로 들어갔어. 그걸 보고 방휘제, 신상초, 엄영식, 박한구, 김형근이 탈출했지. 일본군 포로를 잡으면 돼지고기를 삶아서 후하게 대접하고 돌려보냈어. 우리가 돼지고기를 준다는 얘기를 듣고 일본 사람들도 많이 탈출했지. 한 일본인은 말 한 가득 기관총을 싣고 투항하기도 했어. 우리 작전은 대성공이었지.


방휘제는 영어를 참 잘했어. 똑똑하고 말도 잘 하는 진짜 엘리트였지. 그런데 성격은 굉장히 과격했어. 엄영식은 차분한 학구파였어. 역사를 계속 공부한 엄영식은 경희대 교수로 은퇴했지.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 우리는 그때 모두 소총수였고 반동이었어. 정말 공산당을 싫어했어. 그 이념을 잘 알았다기보다 집에 가고 싶은 우리를 집에 보내주지 않아서였지. 차라리 임시정부로 갔으면 했어.


조선독립동맹에서 조선의용군으로 인계된 후에 조선의용군 사령관이 독일제 쾌만지 권총으로 우리를 위협했어. 신상초가 “우리는 의용군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조선의용군 장군에게 한마디했어. 장군은 같이 싸우든지 아니면 죽자고 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조선의용군이 됐어. 방휘제와 나는 그때부터 사고를 많이 쳤지. 방휘제와 나는 술 한잔 걸치면 중국 거리 거리에 걸린 모택동 찬가 현수막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도 했지.


중국 태행산에서 간도까지는 걸어서 한 달 반이 걸렸어. 중간에 기차를 네 번 탔고. 간도 가는 길에 해방 소식을 들었어. 거리에서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지. 그리고 집에 갈 생각에 모두 들떠 있었어. 그런데도 의용군은 우리를 풀어주지 않았어.


그때 무정 장군과 김일성 사이에 알력다툼이 있었다고 하더군. 김일성은 이미 북한의 조직을 장악한 상태였는데 만주에 있던 조선의용군이 자꾸 북으로 들어오니까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지. 그래서 한없는 기다림이 시작됐고, 우리는 끝내 탈출을 결심했어.


나와 엄영식, 안국두, 신상초, 정근석이 입을 맞췄어. 정근석의 아버지가 문익환 목사와 친했어. 간도에서 문익환 목사 동생인 문동환 목사가 우리를 두만강까지 안내해줬어. 문동환 목사는 따뜻한 한복도 마련해줬지. 너무 추워서 의용군 방한복을 한복 위에 걸쳐야 했어. 두만강을 건너니 회령.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 한 끼를 부탁했더니 동태국 한 사발을 떠 줬어. 동태국을 먹고 몰래 화물기차에 올라 주을로 갔지. 그곳에 고모가 계셨거든. 고모댁에서 잠시 머물다 우리는 다시 몰래 기차를 탔지. 탈출한 의용군 전부 수배령이 내렸어. 일본 학병으로 끌려간 지 2년 만에 집에 가는 기차를 탄 것이지.


엄영식은 평안북도 고읍에서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나는 곽산역 도착 직전에 뛰어내렸어.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정미소로 뛰어갔더니 누나가 있었어. 누나는 너무 놀라 울면서 일본군이 전사통지서를 보냈다고 했지. 그 길로 달려 집에 갔더니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기절하셨어. 집 안에 내 영정사진이 놓여 있었어.


밤낮으로 고기 잔치가 열렸어.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부모님은 정말 기뻐하셨지. 옆 동네 처녀랑 약혼식도 올렸지. 진남포 처녀였는데 그때 갓 스무 살. 그렇게 한 달이 금세 지났어. 늦은 밤 보안서에서 세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지. 나를 잡으러 온 거야. 그때 보안과장 김상순은 내 보통학교 동기생이었어. 아버지가 돈봉투를 보안서 사람에게 건네면서 내일 오전 보안서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지. 새벽 3시. 나는 또 도주 길에 올랐어. 고향 마을을 떠나는데 어쩌면 부모님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실제로 그때가 마지막이었지.


정주에서 몰래 해주행 기차에 올랐어. 월남하려는 사람들로 기차가 인산인해였지. 그곳에서 친구 이욱근을 만났어. 이욱근과 함께 산을 타고 중간 중간 소련군 검문도 받았지. 다행히 조선의용군 마크가 있어 검문은 문제 없이 통과했어. 의용군 마크가 소련 말로 써 있었거든. 무사히 38선을 넘고 청단에 도착했지.


이후 서울 북아현동에서 이욱근과 함께 하숙집에서 살았지. 이욱근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입대해 장군이 됐지. 나는 북한과 좌파 사정에 밝아 미군 방첩부대에서 군무원으로 일했고.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갔어.


약혼한 처녀가 무척 보고 싶었지. 그런데 어느 날 그 처녀가 고향을 버리고 월남해 서울로 찾아왔어. 목숨을 걸고 탈출했겠지. 너무 고맙고 미안해 신촌 기차역 앞에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어. 나는 그 처녀와 얼마 전까지 같이 살았어. 2남 4녀도 있지. 큰 아들이 벌써 환갑을 넘었어. 그때 그 처녀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일본군, 조선의용군을 거쳐 수배령 때문에 고향을 버려야 했던 친구가 나를 포함해 13명.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세 명이 살아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어. 먼저 간 친구들 볼 날이 머지않았어. 소총수로 다시 만나진 않겠지. 다들 모여서 소주 한잔 하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