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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낮추는 교황의 더없이 큰 野心

joyhome 2014. 8. 16. 14:01

한없이 낮추는 교황의 더없이 큰 野心

    

                                     

강천석 칼럼 입력 : 2014.08.15

 

누구처럼 말하는 사람과 누구 같이 사는 사람 차이

예수 같이 부처 같이 우리 곁에 사시던 분들의 기억

 

사람은 제 두레박 크기만큼 세상을 퍼 올린다. 우물이 찰찰 흘러넘쳐도 제 그릇보다 더 많이 퍼 담을 수는 없다. '프란치스코 바람'은 나무 밑동을 부러뜨리는 태풍이 아니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처럼 더위에 지친 8월의 이파리들을 흔들어주는 그런 바람이다. 이 바람을 맞으며 고작 그때 그 전화 다이얼을 누가 돌려줬을까 하는 하찮은 문턱이나 더듬는 처지라서 '사람의 그릇'이란 말이 더 마음에 걸리는 요 며칠이다.

 

1950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주간지를 창간하고 일간지를 만들며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여든아홉 난 기자는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안녕하세요, 저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라는 노크 소리에 아연 긴장하고 당황했다. () 베드로의 후예는 말을 이어갔다. "왜 당황하세요. 저에 대해 알고 싶다고 신문을 통해 편지를 쓰셨잖아요. 그래서 전화 드린 겁니다. 혹시 이번 주 화요일 시간 내실 수 있나요. 불편하시면 다른 날을 잡고요." 아무리 백전노장이라 해도 이 대목에서 "그날은 선약(先約)이 있는데요"라는 말은 꺼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교황과 이 언론인 간의 종교적·정신적 거리는 바티칸과 바티칸을 둘러싼 로마 사이의 지리적 거리보다 몇 백배 멀다. 교황의 초대를 받은 노()기자는 '()이란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매력적인 발명품'이란 생각을 평생 지니고 살아온 무신론자(無神論者)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 "치과에 가 진료 차례를 기다릴 때마다 대기 시간에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이렇게 기다림에 익숙하고 "남을 자기네 종교로 개종(改宗)시키려 드는 건 허황된 짓"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교황이다. 그 교황이 '상대를 알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여 세상에 대한 이해를 늘려가기 위해서는' 대화라는 모험에 서슴없이 몸을 담그는 모양이다.

 

며칠 후 교황과 무신론자는 마주앉았다. 서로 "당신을 잘 아는 제 친구들은 당신이 날 개종시킬지 모른다고 걱정한다"는 농담을 주고받는 걸로 대화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젊은이들이 겪는 실업과 노인들이 마주하고 있는 막막한 고독이란 사회문제로부터 맑고 가난한 교회, 그 청빈(淸貧)한 교회가 부자의 도움으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거쳐 신()을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이 사라진 다음의 신의 위치라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화제로까지 뻗어나갔다. '믿고 사랑하는 종교적 영혼''흔들고 의심하는 지적 영혼'이 부딪치다가 나란히 걷고, 나란히 걷다가 다시 부딪치며 엮어가는 드라마의 내용은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에 잘 나와 있다.

 

세상 모든 종교의 모든 성직자는 그 종교의 근원이던 최초의 스승처럼 말한다. 이 점에선 프란치스코 교황이라 해서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말라 타들어가는 세상을 적실 수 없다. 그뿐이라면 교황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완강한 무신론자가 거리가 느껴지는 '교황 성하(聖下)'라는 호칭 대신 '프란치스코'라고 더 친근한 느낌을 담아 부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태는 무신론자가 '당신은 나를 개종시킬 의도가 없다고 하시고는'하고 교황의 자력(磁力)에 애교 있게 저항하는 데까지 번져갔다.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힘은 '누구처럼' 말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힘은 예수를 본받아 예수와 똑같이 살아가겠다는 결심과 행동에서 우러나는 힘이다. 교황은 "우리는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가 돼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교황의)권한이 허락하는 모든 걸 하겠다"고도 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교황 스스로가 이 꿈을 '겸손한 야심(野心)'이라고 했다.

 

'삶은 평범하지요. 우리는 더 평범해져야 해요' 하는 사람. 돕는 사람의 빨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얀 옷에 얼룩이 지지 않도록 조심조심한다는 사람. '자신이 교황으로 있는 동안 교회는 신앙의 가치를 알리고 전파하는 성스러운 한계를 결코 넘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 '평범(平凡) 교황'이 자신이 본받고 섬기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교회'라는 이상을 위해 당시의 기득권 세력인 교황과 교계(敎界) 지도층과 협상하고 타협했던 역사까지 거론하는 걸 보면 예사 결심이 아닌 게 확실하다. 교황이 무신론자와 대화를 끝내며 '당신 가족에게 내 축복을 전해주시고 그분들께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해주세요'라고 '아름다운 거래(去來)'를 제안하는 걸 보면 놀랍기도 하다.

 

'예수님처럼 부처님처럼' 말하는 걸 넘어서서 '예수와 같이 부처와 같이' 우리 곁에 사시던 분들의 기억이 아스라해져 가는 오늘이다. '겸손한 교황의 담대(膽大)한 야심'이 바꿔 갈 내일에 대한 관심이 그래서 더 큰지 모른다.

 

강천석 논설고문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