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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적 운명과 운명적 운명

joyhome 2022. 3. 28. 11:00

숙명적 운명과 운명적 운명

 

 

사람이 이 세상에 올 때 두 가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숙명적 운명이고 다른 하나는 운명적 운명이다. 숙명적 운명은 몸속의 뼈와 같아서 변하지 않지만 운명적 운명은 몸을 이루는 살과 같아서 그 사람의 창조적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개선되거나 발전할 수 있다. 흔히들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라는 말은 운명적 운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숙명적 운명은 그 사람의 절대적 카르마에 의한 영적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인과율에 의해 짜여진 영혼의 계획표이며 신성한 자연의 법칙에 의한 불문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힘은 '쓰나미'와 같은 괴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의 내면적 영역에 깊숙이 숨어 있다가 그 작용의 시간이 오면 서서히 나타나 그 사람의 운명을 지배한다.

 

숙명적 운명은 피해갈 수 없으며, 극복할 수 없다. 그 사건들은 미리 계획되어져 있고 그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린 아기일 때부터 시작된 정신적 질병이나 불구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나는 장애아의 경우를 보면, 그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에게 일어나는 그런 일들이 생각조차 하기 싫은 불행한 상황이지만 아이의 영혼은 자신을 잡아끄는 카르마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기꺼이 그 고통의 몸을 선택하여 이 세상에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영혼은 자신이 과거생에 저지른 죄를 속죄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런 병든 몸을 일부러 떠맡게 되는 것이다. 즉 그 영혼이 과거생의 심각한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후회하는 경우에 자발적으로 그런 육체를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대부분은 고차원의 힘이 그 영혼에게 부여한 영적 임무라 할 수 있다. 고차원의 힘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병든 육체를 지정하여 주고 그 영혼이 과거의 잘못을 속죄할 수 있도록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그때의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 영혼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리딩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루게릭병(아래에서부터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굳어오는 병)에 걸려 방안에만 누워있는 어린 소녀의 경우의 사례에서, 그 아이는 고대 로마에서 권력자로 살았으며, 그때 원형경기장에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 야수를 풀어놓아 그들이 공포에 질려 허우적대며 도망 다니다가 끝내는 야수에게 잡아먹히는 처참한 모습을 즐겼던 잔인한 장군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에서는 어릴 때 부모의 실수로 온몸에 화상을 입은 남자아이는 중세 유럽의 마녀 사냥이 한창이었던 시대에 신분이 높은 성직자였는데, 그때 그는 무고한 여자를 마녀로 몰아 화형 시켰던 심각한 카르마를 지었는데 그 결과가 지금의 문제의 원인이라고 리딩은 밝혔다.

 

또 다른 예의 경우에는 동물원 사육사가 자신이 관리하던 하마에게 물려 죽임을 당한 것은 그가 아프리카에서 밀렵꾼으로 살았을 때 지은 카르마의 결과라고 리딩은 지적했다.

 

앞의 사례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피할 수 없는, 이미 예정되어진 숙명적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숙명적 운명은 카르마 법칙의 중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운명적 운명은 자신의 창조적 의지와 노력에 의해 현재 처해진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대해 보다 나은 수준으로 개척할 수 있으며 변화될 수 있다.

 

운명적 운명은 숙명적 운명에 비해 그 무게와 깊이가 가볍고 얕다고 할 수 있다. 숙명적 운명을 깊고 사나운 바다에 비유한다면 운명적 운명은 호수나 강에 비유할 수 있다.

 

'습관은 운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습관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유전적 소양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개선되고 개척될 수 있다. 그 말의 뜻은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의 의지로 개척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로 성공하는 이야기나, 병약한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건강해지는, 어느 마라톤 선수가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세계적 명사가 되듯이 운명적 운명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창조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숙명적 운명은 어떤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적 채무이기 때문에 그 카르마에 대한 빚은 언젠가는 꼭 갚아야 한다. 그것이 두 운명이 가지는 차이점이다.

 

앞에서 말한 그런 불구의 몸을 선택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카르마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적 의지로 그런 육체를 일부러 택하는 영혼들도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육체적 장애가 크면 클수록 영혼은 카르마의 빚을 빨리 청산하고 더 빨리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 예의 상징적인 인물로는 미국의 헬렌 켈러(1880~1968)나 영국의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1942~2018), 일본의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1976~)가 있다. 그들은 장애를 통해서 그 불완전함을 성공적으로 이겨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생의 장애물들을 오히려 자신의 영적 진보의 디딤돌 삼아 다른 장애자의 등불이 되었다. 그래서 육체적 장애를 맞아들이고 극복하는 영혼은, 지구의 기준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영혼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하게 된다. 그 보상은 물질적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 발전으로 나타난다.

 

육체적 장애 동안에 많은 장애를 극복하면 할수록 그 후로 영혼은 환생의 횟수가 줄어들게 된다. 즉 영적 개성의 모난 부분을 연마하기 위해서 육체적 삶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생애서 그런 정신적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의 주인인 영혼이 왜 지금의 육체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육체의 일부분이 영혼이 아니라 영혼의 일부분이 육체라는 사실을 알면 말이다. 숙명적 운명과 운명적 운명, 그것은 원래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희망과 절망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영적 완성을 이루기 위한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숙명적 운명을 지닌 사람들은 빚(카르마)을 갚으면서 자신의 영적 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운명적 운명을 지닌 사람들은 더 높은 영적 자아의 완성과 성취를 위해 자신의 창조적 의지로 지금의 삶을 지혜롭게 운영해 나가야 한다.

- 박진여·최영식 저 《또 다른 이가 나를 낳으리》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