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 사이
시 /이 생 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시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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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고있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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