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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사이

joyhome 2022. 12. 7. 21:01

아내와 나 사이

시 /이 생 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시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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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고있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