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신문 기사들

이상한 나라 한국

joyhome 2008. 2. 9. 21:47

이상한 나라 한국

 

[정경희의 곧은소리]  2008년 02월 04일

 

우리가 살고있는 이 나라, 이 사회가 얼마나 살벌한 폭력의 세계인가. 지난 1월29일 서울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용산구의 한 어린이집에서 다섯 살의 여아가 또래 친구와 싸우자, 여교사가 발가벗겨 밖으로 내보내 10∼15분 동안 서있게 했다. 이날 서울은 최저기온 영하 9.75도, 낮 최고기온도 영하 1.6도의 강추위였다(조선·1월30일).

경기도 수원에서 노숙하던 15세 소녀가 폭행 치사된 시체로 발견된 것은 지난해 5월14일 새벽이었다.
경찰은 이때 정모군, 김모양, 조모양 등 10대 3명을 구속 기소하고, 18세 소년 1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또 29세의 노숙자 정모씨 등 2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사건이 검찰로 넘어간 뒤 노숙청소년 5명이 폭행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졌다. 발단은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고 받은 3만원 중 2만원을 숨진 김모양이 훔친 것으로 알고 폭행한 끝에 죽게 한 것이었다(한겨레·1월31일).

 

▲ 조선일보 1월30일자 1면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 했다. 그들은 어른들의 생각과 행동을 별다른 생각 없이 모방하고, 되풀이하고 있다. 수원에서 끔찍스런 죽임을 당한 소녀는 어른들이 저지른 폭행치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나라 어른들이 얼마나 썩었는가? 대표적인 사건으로 지난해 12월19일 경남에서 치른 청도군수 재선거요 영천시장 재선거를 들 수 있다.

먼저 돈선거가 불거진 청도에서는 최근 전후 두 차례(1월28, 29일) 58명이 자수(또는 자진 출석)했다. 이들은 선거운동원이거나 5∼10만원을 받은 유권자들이다. 경북경찰 수사당국자에 의하면 "뿌려진 돈이 수억 원"이라고 했다(한겨레·1월30일).

꿈이 사라진 정치…돈봉투 선거로

영천시장 재선거에서도 후보의 사조직 운동원이 2억 원을 받아, 읍면동 책임자 17명에게 모두 1억 6백만 원을 뿌린 혐의를 받고 있다(한겨레·2월2일). 이 돈 선거에 연루된 3명이 1월31일 긴급 체포됐다.

돈 받고 투표권을 팔아먹는 얼빠진 유권자가 과연 청도와 영천에만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하필 청도, 영천 두 군데에서 재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주권을 돈과 바꾼 부정행위가 수사망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될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사회정의에 대한 꿈도 산산조각 난 오늘날 정치현실의 결과일 것이다. 오늘날 이 나라 주권자의 긴장감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가 '노세 노세 바람'이다.

지난해 해외여행, 유학, 연수 등으로 해외에 퍼부은 돈은 자그마치 205억 9천만 달러였다(한겨레, 조선·1월31일). 땀 흘려 수출해서 얻은 돈을 해외여행과 유학, 연수 등으로 까먹는 얼빠진 한국인. 기세도 당당하게 신용카드를 그으면서 땀흘려 이룩한 돈을 까먹는 '탕아(蕩兒)'와도 같다.

해외유학 광풍처럼 너도나도 쏟아져나가는 해외여행 바람에도 졸부들의 못 말리는 허영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는 졸부들에게 청교도적 절제를 다그치는 정신적 권위가 없는 도덕적 폐허와도 같다.

위기의 민주주의, 새 의제설정을

전북 전주시 도심에서 벗어난 덕진구의 전북은행 지점 앞에서 구두를 닦고, 수선도 하는 조규완씨(63세). 그는 음력설을 앞두고 주민센터에 지난 1월말 어렵게 모은 50만 원을 내놨다.
어렵게 살고 있는 그는 7년째 명절 때마다 선행을 하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그는 30만원에서 50만 원 등 해마다 400만∼500만 원씩 불우이웃을 위해 내놓고 있다(한겨레·2월2일).

 

▲ 한겨레 2월2일자 28면  
 

졸부들의 해외유학 광풍과 해외여행 광풍이 국제수지 흑자를 깎아 먹는 이상한 나라 한국. 돈봉투로 흥정하는 부정선거판. 엄동설한에 어린 아이를 발가벗겨 밖에 세워두는 잔인한 어린이집.

그것은 모두 민주화나 사회정의에 대한 꿈을 상실한 오늘날 이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나 해마다 불우이웃 돕기에 구두를 수선하고, 닦은 돈 400만∼500만 원을 내놓는 63세 독지가의 따뜻한 선행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우리의 문제는 그 갈림길의 키를 쥐고 있는 언론권력이다. 여론을 과점지배하고 있는 언론권력은 기득권집단에 의한 정권교체를 정당화하고, 엄호하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일방적인 편파언론을 일삼고 있다.
그런 한편에서 해외유학 광풍에 해외여행 광풍까지 겹쳐, 국제수지를 갉아먹는 이상한 나라가 됐다. 또 유권자의 마음을 감동시킬만한 의제를 설정하지 못한 선거는 노골적인 돈봉투선거로 전락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언론은 위기의 한국민주주의를 위해 새로운 의제를 제기해야 될 절대적 명제 앞에 서있다. 그것이 한국언론의 현실이다.

 

정경희 선생은 한국일보 기자, 외신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92년 '위암언론상', 2002년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다.

1996년 8월부터 미디어오늘에 '곧은소리' 집필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고대사회문화연구'(1990),

'정경희의 곧은소리'(1999), '실록 막말시대-권언 카르텔의 해부'(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