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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수와 김인주는 오래 갈까

joyhome 2007. 12. 8. 18:27

 

이학수와 김인주는 오래 갈까

 

총수일가의 신임 아래 불법 경영권 승계 등에 개입 의혹…

사법처리 피할까, 이재용 시대에도 잘 나갈까

 

▣ 김영배 기자 

 

삼성 비자금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개시의 실마리로 작용한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11월6일 고발장에는 피고발인으로 3명의 실명이 거론돼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부회장), 김인주 전략지원팀장(사장)이다.

 

이 회장과 더불어 삼성그룹 권력 구도에서 최상층부를 구성하는 이 부회장, 김 사장은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의 진술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김 변호사의 양심 고백 내용 중에서 ‘삼성 사태’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꼽히는

‘삼성에버랜드 사건’ 재판의 증인·증언 조작의 장본인으로 이 두 사람이 지목됐다.

김 변호사 양심 고백의 종합판인 11월26일 기자회견 때도 두 사람의 이름은 곳곳에서

거론된다.

 


△ 삼성 전략기획실의 이학수 실장(부회장·왼쪽사진/ 한겨레)과 김인주 전략지원팀장(사장·오른쪽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은 이건희 회장에 이어 삼성 권력의 최상층부를 이루고 있다.

회장실 옆 이학수의 방

 

<한겨레21>이 따로 확보하고 있는 김 변호사의 진술 중에는 삼성의 권력 구도에서 차지하는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의 비중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여럿 있다.

 

김 변호사는 10월2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한 첫 기자회견 전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권력은 최고 권력자와 떨어진 거리의 세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재미있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삼성그룹에서 이건희 회장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이 부회장의 막강 파워를 설명하는

은유였다. “이학수 부회장 방은 28층에 있다. 회장실 옆이다.

 

27층에는 재무, 인사 담당팀이 있고. (홍보팀이 있는) 26층은 지원부서로, 그냥 심부름하는

곳이다. 27층과 격이 다르다.”

 

이건희 회장에서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로 그룹의 권력이 원활하게 넘어갈 경우

이학수 부회장의 후계로 점쳐지는 김인주 사장이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음을 내비친 진술도

 있었다.

“본래 김인주 사장이 최○○ 부하였다. 그런데 뒤집어졌다. 이학수 부회장이 같은 PK(부산·경남) 출신에 자기 아래서 제일모직 경리과장을 지낸 김 사장을 후임자로 키운 거다.

 

보통 빨라야 2년마다 한 번씩 승진을 하는데, 김 사장은 7년 연속 승진해 금방 사장까지

올라갔다.

비밀을 잘 지키고 음지에서 일하는 성격이라….” 시일이 흐를수록 김 사장 쪽으로 힘이

실리고 있어 전략기획실 안에서는 이 부회장보다 김 사장 쪽으로 줄을 서는 분위기도

있다고 한다.

 

이 부회장과 김 사장이 삼성그룹의 여느 부회장이나 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힘을 쥐고 있는 배경에는 그룹의 돈줄과 인맥, 그리고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전략기획실이 자리잡고 있다.

옛 비서실·구조조정본부를 이어받은 전략기획실의 핵심 구성원들이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전무로 이어지는 그룹의 승계 구도를 짜고 실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

또한 두 사람이 승승장구한 비결로 꼽힌다.

비서실에 해당하는 전략기획실에 이처럼 막강한 힘이 쥐어져 있는 것이 ‘이건희 체제’

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일까?

 

삼성그룹에 비서실이 생겨난 것은 1959년 5월이었다. 재계의 인맥과 혼맥을 다룬

<서울신문>의 2005년 1월17일치 보도를 보면, 삼성의 비서실은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탄생했으며, 그룹 규모가 날로 커져 계열사들을 직접 챙기기 어려워진 데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비서실은 처음엔 삼성물산 안의 ‘과’ 조직이었고, 직원 규모 또한 20명 남짓이었다.

초대 실장은 당시 제일모직 총무과장이던 36살의 이서구씨였다.

이때만 해도 비서실의 힘은 그리 크지 않았던 듯하다.

외환위기 이후 ‘재무통’이 실세로

 

삼성 비서실의 힘이 막강해진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세에 힘입어

삼성그룹의 규모 또한 급팽창하던 시기였다. 특

히 1978년부터 1990년까지 10년 이상 비서실을 이끈 소병해 실장 시절에 비서실의 규모와

권한은 비약적으로 커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소 실장 시절 비서실은 15개 팀에 250명 안팎의 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능도 인사 위주에서 감사, 기획, 재무, 국제금융, 경영관리, 정보시스템, 홍보 등으로 다양해졌다. 그렇지만 이때 역시 이건희 회장 시대의 구조본이나 전략기획실 수준의 힘을 갖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사정을 엿보게 하는 일화가 하나 남아 있다. 비서실에 힘이 실리자, 주변에서 ‘소 실장의 파워가 하늘을 찌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계열사 사장들이 이사급인 소 실장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까지 나타난 즈음 이병철 회장이 나섰다. 이 회장은 소 실장을 불러 “소군, 자네는 직책이 뭐꼬”라고 물었다. 이에 소 실장은 “예, 저는 이사입니다”라고 답했고, 이 회장은 “그래 이사제, 이사 맞제”라고 확인시켜줌으로써 계열사 사장들 위에 군림하지 말라는 경고를 날렸다고 전한다.

더욱이 1987년 11월 이건희 회장 취임 뒤부터는 계열사별 자율경영을 중시하는 방침에 따라 비서실의 기능과 권한은 점차 축소됐다. 소 실장에 이어 비서실장을 맡은 이수빈, 현명관씨 역시 ‘권력’에 근접한 거리 덕에 상당한 힘을 발휘했지만, 이학수 부회장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이다. 비서실의 역할을 일정하게 제약하는 분위기였던데다 두 사람 모두 ‘이건희의 사람’이라기보다 ‘이병철의 사람’이라는 한계도 안고 있었다.

삼성 비서실이 질적 변화를 일으키며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외환위기’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비서실의 이름이 구조조정본부로 바뀐 게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4월이었다. 당시 조처는 김대중 정부의 재벌 개혁 방침을 일정 부분 수용한 것이었다. 외환위기 직후 각 재벌 그룹의 비서실은 제동 장치 없는 ‘황제 경영’의 작동 고리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삼성그룹 내부적으로도 외환위기라는 급격한 환경 변화를 맞아 그룹 경영의 방향타를 ‘사업 확장’에서 ‘조직 슬림화’로 잡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기도 했다. 이는 삼성그룹 상층부의 권력 축이 ‘전략통’에서 이학수 부회장으로 대표되는 ‘재무통’으로 옮아간 계기였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외환위기 이전의 비서실장 또한 의전상의 수행비서로만 생각할 수 없고, 일본의 기업집단에서처럼 그룹 전체의 전략, 재무관리, 인사 등 3개 핵심 영역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며 “다만 강조점이 예전엔 인사와 투자였던 반면, 외환위기 뒤에는 재무 쪽으로 이동했다”고 분석한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그룹 전체가 부도 위기 상황을 맞았다. 사업 확장보다는 효율화를 꾀해야 할 상황이었다.” 사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삼성은 공격적으로 새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기존에 하던 일을 더 잘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왔다. 이는 외환위기라는 환경에서 비롯된 조처였지만, 구조본 재무팀이 주도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했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은 삼성의 대표적인 재무통으로 외환위기 이후 삼성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더욱이 두 사람은 외환위기 직전 시작된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총수 가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고백 뒤 불법 경영권 승계를 비롯한 삼성의 각종 비리 혐의에 두 사람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배경이다. 전략기획실을 통해 삼성그룹을 장악하고 있는 두 사람의 힘이 그다지 정당하지 못한 원천에서 비롯되고 있는 셈이다.

 

이건희-이학수, 이재용-김인주?

 

지난해 삼성그룹의 ‘2·7 대국민 사과 선언’으로 8천억원을 사회에 헌납한다는 발표를 할 즈음

그룹 내부는 이학수 부회장을 퇴진시키느냐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2·7 선언의 빌미가 ‘삼성공화국 논란’을 불러일으킨 ‘X파일’(옛 안기부 불법 도청 기록)

사건이었으며, 이 부회장은 X파일에 홍석현 중앙일보사 회장과 나란히 등장해 불법 로비의

핵심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2·7 선언에 즈음해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건희 회장의 만류로

뜻을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이 (회장으로) 올라설 때까지 계속하고, 그 다음에 김인주 사장에게 (전략기획실장직을) 넘겨주라”는 게 회장의 뜻이었다고 한다.

 

이 회장과 이 부회장의 관계가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비밀을 공유하는 운명 공동체일

것이라는 해석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다.

 

이학수 부회장과 그의 후계자로 점쳐지는 김인주 사장이 그룹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물러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직·간접적인 여러 정보로 판단할 때 총수 일가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거꾸로 결정적인 순간에 두 사람의 입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요인이기도 하다.

비자금 조성을 비롯한 갖가지 추문으로 총수 일가가 엄청난 시련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나 특검의 조사 결과에 따라선 이 부회장과 김 사장이 사법 처리되는 운명에 처할 수

있다. 이같은 법적 리스크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건희 시대’를 넘어 ‘이재용 시대’에도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을지 또한 불투명하다.

 

이건희 회장과 더불어 자연스레 퇴장할 것으로 보이는 이 부회장뿐 아니라 김 사장도

‘이건희의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이학수 체제’를 ‘이재용-김인주 체제’로 잇는 구도는 어쩌면 이건희 회장의 머리

속에만 머물고 말지도 모른다.

 


삼성의 돈줄을 관리하는 사람들

제일모직 시절 경리과 출신으로 핵심 위치에 오른 이학수·김인주

이건희 회장에 이어 삼성그룹의 2인자로 꼽히는 이학수(61) 전략기획실장(부회장)은 경남 밀양 태생으로, 부산상고와 고려대 상대를 졸업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1년 선배다.

이 부회장이 삼성과 인연을 맺은 건 1971년 삼성계열 제일모직에 입사하면서부터였다. 삼성그룹의 ‘모태’(母胎)격인 제일모직에서 경리과장, 관리부장을 거친 뒤 1982년 그룹 회장비서실 운영1팀장에 발탁된 뒤부터는 거의 대부분의 경력을 비서실에서 쌓았으며, 비서실을 이어받은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에서 잇달아 최고 책임자로 발탁돼 일하고 있다.

거쳐온 이력에서 짐작돼 듯 이 부회장은 삼성의 돈줄을 관리하는 재무통으로 꼽힌다. 또한 구조조정본부장에 이어 전략기획실장을 맡고 있어 계열사 지분과 재산 관리에서부터 그룹의 투자 계획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주요 사안을 사실상 총괄하고 있다. 전략기획실 산하 기획팀에서 청와대, 국회, 정부부처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어 삼성의 모든 정보는 이 부회장에게 모이고 있다. 전략기획실의 핵심으로 꼽히는 김인주 사장, 최광해 부사장 등이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으로 이 부회장의 직계여서 삼성의 핵심 인맥까지도 이 부회장 손에 쥐어져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경남 김해 출신의 김인주(49)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장(사장)은 마산고,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학수 부회장 뒤를 이어 전략기획실을 책임질 인물로 꼽혀왔다. 김 사장은 1997년 삼성 회장비서실 재무팀 이사로 발탁된 뒤 줄곧 그룹의 자금줄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아왔다. 현재 팀장을 맡고 있는 전략지원팀 또한 구조본 시절의 재무팀 업무를 이어받은 조직이다.

이 부회장과 김 사장을 모두 한 차례 이상 접촉해본 인사로부터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외모만큼이나 경영 스타일에서도 차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이 부회장이 좀 허술한 것 같으면서도 큰 방향을 잡는 스타일이라면, 김인주 사장은 철저히 하나하나 따지고 점검해 의사 결정을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