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신문 기사들

‘검찰의 말’과 ‘사기꾼의 말’

joyhome 2007. 12. 9. 00:23

 

‘검찰의 말’과 ‘사기꾼의 말’

 

얼마 전 ‘올해의 인물로 김경준을 꼽은 이유’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더니,

주변에서 이의가 제기됐지요.

“신정아 아닌가?”라고. 우리 마음속에는 신정아에 빠졌던 날들이 여전히 남아있지요.

두 인물을 놓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결국 ‘올해의 인물’로 김경준의 손을 들어준 것은 다음의 이유였지요.

①통상 선정 시점에 가까운 뉴스에 더 가산점이 주어짐

②12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한국 감옥에 갇히기 위해’ 귀국한 그 행위의 미스터리

③대선 후보 선택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거의 정지시켜버린 영향력.

 

그렇게 칼럼을 썼으나,

내심 “김경준이 아니라 어쩌면 신정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지워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검찰의 수사발표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애초 제 판단이 옳았다고.

‘금융사기꾼’으로 소문난 그가 지금 우리 사회를 폭풍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날 야근을 위해 저녁 먹으러 나갔더니, 신문사 부근 식당이 ‘외지인’들로 붐볐습니다.

옆 광화문 광장에는 여권의 정동영 후보 측 지지자들이 몰려와 있었지요.

‘수사 무효’ ‘국민 심판’이라는 피켓들이 줄을 섰고, “정치검찰” “검찰은 존재 의미를 스스로

부정” “국민을 우롱하고 배신”이라는 분노(憤怒)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렸습니다.

이들은 5년 전 이맘때, ‘미선이 효순이’ 촛불시위를 꿈꾸고 있겠지요. 이대로 가면 명백히
지는 대선 게임. 시장통으로, 아파트로, 지방으로 아무리 외치고 돌아다녀도,
더 이상 표(票)가 모이지 않는 유세(遊說)에 지쳤지요.
대선판을 마지막으로 흔들 수 있는 것은 어쩜 광화문 거리 시위밖에 안 남았을지 모릅니다.

사실 김경준이 ‘올해의 인물’로 뽑힌 것은, 저 혼자서 선정해본 것이지만,
그의 힘으로만 된 것은 아니지요. 그 가족들이 차례로 매스컴에 출연해 뒤를 받쳐줘서 된 것도 아닙니다. 고장난명(孤掌難鳴: 한 손으로는 박수 소리가 나지 않음)이라,
정치권과 일부 언론매체의 공조가 없었다면 어림없었습니다.

특히 여권은 ‘금융사기꾼’ 김경준에게 모든 판돈을 걸었지요. 대선판에 체면 명분 수단 방법 따위를 가릴 게 있을까요. 대선 끝나고 난 뒤 추후 계산하면 됩니다. 5년 전에도 ‘김대업’이라는 인간을 내세워 그렇게 해본 적이 있었지요. 어쨌든 정치인과 일부 언론이 전적으로 사기꾼을 신봉하니, 그로 인해 우리 사회 전체가 판단의 미혹(迷惑) 속에 빠지게 됐지요. 우리가 사기꾼을 얼마나 대접해줘야 할까요.

백번 양보해도, 한낱 사기꾼의 말보다는 검찰의 말을 더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기꾼의 말보다 더 신뢰받지 못하는 검찰이라면, 과연 앞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어떻게 증명해낼지 몹시 궁금하군요. 여당 후보로부터 “거짓말쟁이 검찰”이라는 직격탄을 맞고도, 그 속의 검사들은 잠잠합니다.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명예와 자존심을 잃을 때 조직은 무너진다고 옛 글에 나오지요.

저를 더욱 혼돈에 빠뜨리는 이는 이회창 후보입니다. ‘법치와 공권력 수호’를 내세워온 이 후보조차 검찰의 말에는 “황당하다”고 외면하고, 사기꾼의 말에서 더 많은 진실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에는 흠결이 너무 많습니다. 속된 말로 “털면 먼지”입니다. 그쪽 진영 안에서도 “이렇게 공인(公人) 의식이 없었을 수가…”라는 개탄이 나왔지요. 그런 그에게 압도적 지지율이 계속 유지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없지 않습니다. 그에게 혹 권력을 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결코 낙관과 희망만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기꾼’의 말만 절대 신봉해 그를 공격하는 것은 균형 감각을 잃은 것입니다. 이 중요한 대선이 그런 사기꾼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방관해도 되는 걸까요. 우리 사회 전체를 김경준이라는 사기꾼에게 내준 꼴입니다. 정치권과 일부 언론매체는 이를 양심과 정의감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이렇게 얕고 초라한 것일까요.

쌀쌀한 출근길 아침, 어제 촛불시위가 벌어졌던 텅 빈 광화문을 지나갔습니다. 시위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인근 빌딩의 용역업체 아줌마들이 두꺼운 점퍼를 껴입은 채 광장 바닥에 떨어져 녹은 촛농들을 긁어내고 있었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최보식 기획취재부장  입력 : 2007.12.07 23:45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