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신문 기사들

영웅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

joyhome 2014. 9. 24. 10:23

영웅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

 

시론-박학용 논설위원

 

필자에겐 일제 때 독립운동하다 고문으로 옥사한 애국지사 유관순은 지금도 누나다. 외국인들에겐 한국에도 잔 다르크가 있다며 우쭐댄 적도 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익힌 지 5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유관순 누나노래는 아직도 애국가처럼 입에 붙는다.

 

그러니 올해부터 고교에서 필수로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 8종 중 4종에 유관순 열사가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소식에 먹먹할 수밖에.

누락 이유도 충격이다.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라는 일각의 주장 때문이란다.

 

우리는 영웅 부재사회에 살고 있다. ‘있는영웅도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 그대로다.

국민에게 존경받는 공인(公認)영웅이래야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고작이다.

지난 60여년 간 경이로운 발전을 일군 대한민국의 심장부 광화문광장에 400500여 년 전 조선시대 두 인물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반만년 역사에 위대한 인물이 이렇게도 없을까 자괴감이 들 정도다.

그러나 따져보면 인물은 많다. ()보다 과()를 잡아내려는 우리 사회가 영웅을 용납하지 않을 뿐이다. 자신들만이 옳다고 강변하는 극단주의자들이 근대화 주역은 독재자로, 민주화 운동의 공로자는 빨갱이로, 산업화 역군은 정경유착 재벌로 족족 폄훼하기 일쑤다.

 

며칠 전 한 중견그룹 오너가 들려준 일화가 머리를 맴돈다. 수년 전 초등학교 아들이 과제물을 도와달라고 했단다.

보통 사람들의 선행(善行) 이야기가 담긴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해 오라는 내용이었다.

모처럼 만에 아버지 노릇도 할 겸 집에서 며칠치 신문만 뒤지면 되겠지 싶어 선뜻 응했다.

런데 3개월치 신문을 샅샅이 훑었는데 단 한 건의 미담기사도 찾아내지 못했단다. 결국 동정란 한 귀퉁이에 박힌 한 인사의 1단짜리 기부기사 하나 달랑 오려 붙여 학교에 제출했다.

그는 우리 사회, 우리 언론이 얼마나 사람 평가에 인색한지 절감했다며 혀를 찼다.

 

선진국은 영웅천국이다. 미국은 유난하다.

결정적 흠이 없는 한 역대 대통령, 유명 기업인, 특정 분야 전문가 등은 존재만으로 존경의 대상이 된다.

이라크전에서 두 다리를 잃었지만 장애 퇴역군인을 돕는 사람,

빈민가에서 키운 채소를 사회적 약자에게 나눠주는 사람,

백혈병을 딛고 암환자들에게 교통편을 제공하는 사람 등 생활 속의 작은 영웅들도 수시로 발굴된다.

어디를 가든 워싱턴, 링컨, 케네디 등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학교와 도로, 공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워싱턴 의사당 내 내셔널스태추어리홀(National Statuary Hall)엔 농부·작가·과학자 등 100명의 소영웅 동상이 들어서 있다.

종종 눈도 안 마주치는 여야 의원들도 동상 앞에선 이들의 역지사지(易地思之) 정신을 공유한다.

 

그렇다고 미국 국민이 영웅들의 과오를 마냥 덮어주진 않는다.

공로에 대한 예우는 깍듯하되 평가는 냉혹하다.

지난해 11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서거 50주기를 즈음해 쏟아진 그에 대한 재평가가 그 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언론은 그를 인종·종교를 초월한 인권법 입안 등 걸출한 업적을 남긴 진보의 아이콘으로 칭송하면서도

세금 감면 등 보수적 정책과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적극 관여한 점 등을 들며 혹평했다.

 

유대인도 ()영웅민족이다. 그들의 영웅들 역시 공적도 많지만 과오도 적지 않다. 어찌 보면 다윗은 부하 장군의 부인과 통정하며 그 부하를 사지(死地)에 내보내 죽게 한 파렴치한이다.

그런데도 유대인은 그를 잘한 일이 많았고, 진정한 참회를 했으며,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했다며 영웅시한다.

그들의 타고난 관용과 긍정적 인간관의 소산이다.

 

우리는 국가적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기댈 만한 영웅이 없다고들 한탄한다.

그러나 영웅을 인정해주려 하기보다 영웅을 죽이려 드는 풍토를 개탄해야 한다.

영웅은 국가를 지탱하는 저력이자 소중한 자산이다.

이제부터라도 크고 작은영웅들을 길이 기억하자.

 

3·1운동의 표상 유관순 열사도,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건네주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려다 숨진 세월호 영웅들도 모두 대한민국의 진정한 영웅이다.

 

가짜영웅을 양산(量産)해서도 안되지만 진짜영웅을 폄척(貶斥)해서도 안 된다.

 

문화일보 게재 일자 : 20140922()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092201033037012002